들국화는 향내로 남는다

이재경
2004-09-19 21:33
9,772
0
본문
늦여름 폭풍우가 무더위를 휩쓸고 간 자리에 옥잠화 꽃대가 불쑥 솟아 올랐다. 꽃대가 올라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뜰 안은 옥잠화 향내로 가득찼다. 향내는 콧속을 온통 뒤 흔들어 놓고는 머릿속 갈피마다 헤집는다. 저녁녘이 되면 향내는 낮보다 더 진하게 풍겨나 창문을 넘어 방안까지 들어찬다. 후딱 스쳐가는 계절의 향내를 조금이라도 더 즐겨 보려고 뜰에 내려설 때마다 시듣 꽃을 몇송이 따다가 책상위에 놓는다. 향내는 온종일 나를 감싸고 돈다.
옥잠화 향내를 맡으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옥잠화 향내뿐이랴. 분꽃 향내, 들국화 향내, 모과와 유자의 향내도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샘솟게 한다.
내가 자라난 집 정원에도 옥잠화가 여러 포기 있었다. 옥잠화가 피면 앞뒤 마당에서 풍기는 향내가 온 집안을 감돌았다. 안동포 고의적삼 차림의 할아버지는 봄부터 물 주고 가꾼 옥잠화가 풍기는 향내의 흥취를 높이려고 축음기를 돌려 사발가를 틀고, 할머니는 얼음을 띄운 수박화채를 마련하신다.
석타안 백타안 타느으은데에에 연기만 푸울풀 나구우요
요 내 가슴 타느으은데에에 연기도 김도 안 나아아네
축음기를 통해 나오는 청아하고 높은 사발가 가락은 옥잠화 향내에 실려 집안을 맴돌았으나, 나는 수박화채의 단맛에 더 취해 기쁘기만 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 무렵이야말로 할머니 생애에서 절정에 달한 시절이었다.
할머니의 나머지 생에는 고난의 세월이었다. 외아들을 잃고, 북쪽 고향에 있던 전재산을 잃고, 전쟁을 겪고, 피난중에 중풍으로 쓰러저 반신불수가 된 할아버지의 병구완을 아홉 해나 치르고, 집을 팔아 유복자인 손자를 대학 졸업시키고, 그러고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낡은 화류 의걸이장 하나 차에 싣고 여생을 의탁하러 내 집에 오셨다.
할머니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향내를 탐하셨다. 여름날에는 모시옷에 잣을 갈아 넣은 풀을 먹여 옷자락에서 잣향이 풍기게 했고 수돗가 사과궤짝에 분꽃을 심어 저녁마다 피어나는 분꽃 향내를 즐기셨다.
"얘야, 이 향내를 좀 맡아 보렴."
가을이 되면 동대문시장까지 가서 부족한 용돈을 쪼개 모과와 유자를 사다 의걸이장 안에 넣으며 내게 자랑하셨다.
"예전엔 여자들이 향낭이란 걸 찼다더라."
할머니는 내게 향내의 의미를 알려 주셨다.
가을이 절정에 닿으면, 할머니는 야외 나들이 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다가 혼자 집을 나서기도 했고 나와 함께 떠나기도 했다. 할머니는 뱌가 누우렇게 익은 들판을 보는것 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고 혼잣말을 하며 추수철 들판을 걷다가, 길가나 냇독위에 핀 노란 들국화를 한아름 꺾어다가 화병에 꽂아 놓으셨다.
"뜰에는 지금쯤 감국(甘菊)이 한창일텐데.... 감국은 향내가 오래 간단다."
돌아가시던 해 가을에, 쇠약해저서 가을 나들이를 못 하게 되었을때, 황금 들판을 그리며 하신 말씀이다.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며 할머니 베개를 뜯었는데, 메밀겨 속에서 언제 넣어 놓았는지 알 수 없는 마른 들국화 한 묶음이 나왔다. 마른 꽃을 끌어 안고 향내를 맡아 보았다. 희미한 잔향을 맡은 듯 느꼈으나 복받쳐 오르는 슬픔이 그 잔향을 흩어 놓았다.
할머니가 돌아 가신 지도 30년이 지났다. 할머니를 잊지 못하는 내 마음은 옥잠화나 분꽃이나 들국화나 유자향을 맡을적 마다 그리움이 더 깊어진다. 향내를 맡으면 저승에 계신 할머니와의 교감이 이루어질 것처럼 느껴져 그 향내를 들이마시곤 한다.
지난 가을에 들판에 나갔다가 노란 들국화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한송이 꺾어 손안에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몇 걸음 가다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몇걸음 가다 다시 주먹을 펴 향내를 맡았다. 온종일 손에 움켜쥔 꽃을 버리지 않았더니 집에 돌아와 손을 씻을 때까지도 들국화 향내는 내 주먹 속에 남아 있었다.
온갖 합성 향내가 개발되어 오나가나 잡다한 향이 우라를 유혹하고 있다. 생활의 여유가 생겨나자 여인들은 취향에 따라 자신만의 독특한 향을 지니려고 수입 향수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손쉽게 향내와 접하게 되는 오늘날의 여인들은, 곤궁한 생활속에서 한 계절 잠깐 스쳐가는 자연의 향내를 붙잡으려고 머리를 짜냈던 우리 선조의 생활의 멋과 지혜를 혜아릴수 없을 것이다.
(1997년 수필공원에서 글쓴이 미확인)
옥잠화 향내를 맡으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옥잠화 향내뿐이랴. 분꽃 향내, 들국화 향내, 모과와 유자의 향내도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샘솟게 한다.
내가 자라난 집 정원에도 옥잠화가 여러 포기 있었다. 옥잠화가 피면 앞뒤 마당에서 풍기는 향내가 온 집안을 감돌았다. 안동포 고의적삼 차림의 할아버지는 봄부터 물 주고 가꾼 옥잠화가 풍기는 향내의 흥취를 높이려고 축음기를 돌려 사발가를 틀고, 할머니는 얼음을 띄운 수박화채를 마련하신다.
석타안 백타안 타느으은데에에 연기만 푸울풀 나구우요
요 내 가슴 타느으은데에에 연기도 김도 안 나아아네
축음기를 통해 나오는 청아하고 높은 사발가 가락은 옥잠화 향내에 실려 집안을 맴돌았으나, 나는 수박화채의 단맛에 더 취해 기쁘기만 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 무렵이야말로 할머니 생애에서 절정에 달한 시절이었다.
할머니의 나머지 생에는 고난의 세월이었다. 외아들을 잃고, 북쪽 고향에 있던 전재산을 잃고, 전쟁을 겪고, 피난중에 중풍으로 쓰러저 반신불수가 된 할아버지의 병구완을 아홉 해나 치르고, 집을 팔아 유복자인 손자를 대학 졸업시키고, 그러고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낡은 화류 의걸이장 하나 차에 싣고 여생을 의탁하러 내 집에 오셨다.
할머니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향내를 탐하셨다. 여름날에는 모시옷에 잣을 갈아 넣은 풀을 먹여 옷자락에서 잣향이 풍기게 했고 수돗가 사과궤짝에 분꽃을 심어 저녁마다 피어나는 분꽃 향내를 즐기셨다.
"얘야, 이 향내를 좀 맡아 보렴."
가을이 되면 동대문시장까지 가서 부족한 용돈을 쪼개 모과와 유자를 사다 의걸이장 안에 넣으며 내게 자랑하셨다.
"예전엔 여자들이 향낭이란 걸 찼다더라."
할머니는 내게 향내의 의미를 알려 주셨다.
가을이 절정에 닿으면, 할머니는 야외 나들이 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다가 혼자 집을 나서기도 했고 나와 함께 떠나기도 했다. 할머니는 뱌가 누우렇게 익은 들판을 보는것 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고 혼잣말을 하며 추수철 들판을 걷다가, 길가나 냇독위에 핀 노란 들국화를 한아름 꺾어다가 화병에 꽂아 놓으셨다.
"뜰에는 지금쯤 감국(甘菊)이 한창일텐데.... 감국은 향내가 오래 간단다."
돌아가시던 해 가을에, 쇠약해저서 가을 나들이를 못 하게 되었을때, 황금 들판을 그리며 하신 말씀이다.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며 할머니 베개를 뜯었는데, 메밀겨 속에서 언제 넣어 놓았는지 알 수 없는 마른 들국화 한 묶음이 나왔다. 마른 꽃을 끌어 안고 향내를 맡아 보았다. 희미한 잔향을 맡은 듯 느꼈으나 복받쳐 오르는 슬픔이 그 잔향을 흩어 놓았다.
할머니가 돌아 가신 지도 30년이 지났다. 할머니를 잊지 못하는 내 마음은 옥잠화나 분꽃이나 들국화나 유자향을 맡을적 마다 그리움이 더 깊어진다. 향내를 맡으면 저승에 계신 할머니와의 교감이 이루어질 것처럼 느껴져 그 향내를 들이마시곤 한다.
지난 가을에 들판에 나갔다가 노란 들국화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한송이 꺾어 손안에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몇 걸음 가다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몇걸음 가다 다시 주먹을 펴 향내를 맡았다. 온종일 손에 움켜쥔 꽃을 버리지 않았더니 집에 돌아와 손을 씻을 때까지도 들국화 향내는 내 주먹 속에 남아 있었다.
온갖 합성 향내가 개발되어 오나가나 잡다한 향이 우라를 유혹하고 있다. 생활의 여유가 생겨나자 여인들은 취향에 따라 자신만의 독특한 향을 지니려고 수입 향수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손쉽게 향내와 접하게 되는 오늘날의 여인들은, 곤궁한 생활속에서 한 계절 잠깐 스쳐가는 자연의 향내를 붙잡으려고 머리를 짜냈던 우리 선조의 생활의 멋과 지혜를 혜아릴수 없을 것이다.
(1997년 수필공원에서 글쓴이 미확인)
댓글목록0